제조업의 병렬 혁명: AI가 바꾸는 설계 방식의 전환
지난 글에서 우리는 AI가 IT 업계에 가져온 근본적 변화를 살펴봤습니다. 린 스타트업이 MVP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테스트했다면, AI는 수백 개의 변형을 동시에 생성하고 검증합니다. '직렬에서 병렬로'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조업은 어떨까요? 소프트웨어와 달리 물리적 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에서는 여전히 긴 개발 기간과 막대한 시제품 비용이 필요합니다. 엔지니어가 하나의 설계안을 완성하고, 시제품을 제작하고, 테스트하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순차적 방식은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제조업의 숙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 제조 현장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AI 기술이 제조업의 설계 방식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IT에서 시작된 '병렬 혁명'이 제조업에서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신호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제조업의 오랜 직렬 한계
20세기 초,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과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는 제조업의 생산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혁신한 것은 '만드는 과정'이었지, '설계하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때, 엔지니어는 여전히 하나의 설계안을 그리고, 시제품을 만들고, 테스트하고, 문제를 발견하면 다시 설계를 수정해야 했습니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과 비용 때문에 보통 2~3개 안만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각 시제품을 만드는 데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리고, 한 번 제작할 때마다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이 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엔지니어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아이디어만 물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더 가볍고, 더 강하고, 더 효율적인 설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탐색하기 위해 수십 개의 시제품을 만들 여력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조업이 오랜 기간 안고 살아온 '직렬의 한계'였습니다.
AI가 만들 수 있는 병렬 혁명
그런데 최근 이 직렬의 한계를 깰 수 있는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AI 기반의 'Generative Design(생성적 설계)'입니다. Generative Design은 엔지니어가 제약 조건만 입력하면, AI가 그 조건을 만족하는 수천 개의 설계 안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무게는 5kg 이하, 강도는 최소 1톤, 재료는 알루미늄, 3D 프린팅으로 제작 가능할 것"이라는 조건을 입력하면, AI는 이 조건을 만족하는 수백, 수천 가지 형태를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각 설계안이 얼마나 가볍고, 강하고, 제작하기 쉬운지를 자동으로 평가합니다.
이 기술은 머신러닝과 진화 알고리즘 같은 AI 기술을 사용합니다. 마치 자연이 수많은 생물 종을 동시에 진화시키듯, AI는 수많은 설계 변형을 동시에 생성하고, 그중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냅니다.
과거 방식을 다시 떠올려보겠습니다. 엔지니어가 설계안 1을 만들고 → 시제품 제작 → 테스트 → 수정 → 설계안 2를 만들고 → 다시 시제품 제작. 이렇게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Generative Design을 사용하면, 수천 개의 설계 안을 컴퓨터 안에서 동시에 생성하고 검증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시제품을 만들기 전에, 최적의 몇 가지 후보를 이미 찾아낸 상태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GM의 시트 브래킷 재설계
GM은 자동차 시트를 고정하는 브래킷을 개발하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존 브래킷은 8개의 부품을 조립해야 했고, 무겁고 복잡했습니다. 더 가볍게 만들면서도 강도는 유지해야 했습니다. 전통적 방식이라면 엔지니어가 몇 가지 설계 안을 그리고, 각각 시제품을 만들어 테스트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GM은 Generative Design을 선택했습니다. 엔지니어는 "어떤 지점에 얼마만큼의 힘이 가해지는지", "어느 부분에 구멍이나 볼트가 필요한지" 같은 기능적 요구사항만 입력했습니다. AI는 이 조건을 만족하는 수백 가지 설계 안을 동시에 생성했고, 각 설계 안의 무게, 강도, 제작 가능성을 자동으로 시뮬레이션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AI가 제안한 설계는 8개 부품을 단 1개로 통합했고, 무게는 40% 가벼워졌으며, 강도는 오히려 20% 더 강해졌습니다.
(출처: https://www.colabsoftware.com/guides/how-generative-design-works-a-guide-for-engineering-managers)
Siemens의 로봇 그리퍼 재설계
Siemens는 산업용 로봇의 물건을 잡는 부품인 그리퍼를 개선하려 했습니다. 기존 그리퍼는 30개의 기계 가공 부품으로 구성되어 무게가 21kg이나 나갔습니다. 무거운 그리퍼는 로봇의 작업 속도를 떨어뜨리고, 에너지 소비도 늘렸습니다. 문제는 경량화를 시도할 때마다 강도나 정밀도를 포기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Siemens는 Generative Design으로 이 딜레마를 풀었습니다. 필요한 강도, 정밀도, 제작 조건 등을 입력하자, AI는 수천 개의 경량화 설계안을 동시에 탐색했습니다. 인간 엔지니어라면 시도해보지 않았을 복잡한 내부 구조들까지 AI가 제안했습니다.
최종 설계는 30개 부품을 단 5개 부품으로 줄였고, 무게는 90% 감소했습니다. 제조 복잡도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가벼워진 만큼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와 탄소 배출도 대폭 감소했습니다.
(출처: https://www.colabsoftware.com/guides/how-generative-design-works-a-guide-for-engineering-managers)
NASA의 우주선 부품 개발
NASA는 우주 탐사 장비의 부품을 개발할 때 극단적인 제약 조건과 싸워야 합니다. 우주로 1kg을 보내는 비용이 수천만 원에 달하기 때문에,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극한의 온도 변화와 진동을 견뎌야 하니 구조적 성능도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부품 하나를 개발하는 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NASA는 Generative Design을 우주선 부품 개발에 적용했습니다. 질량 목표, 안전 계수, 다른 부품과의 인터페이스, 구조적 하중, 제조 방식 등을 디지털로 입력하면, AI가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수천 가지 설계를 자동으로 생성하고 검증했습니다.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개발 시간과 비용이 10배 이상 단축되었고, 동시에 구조 성능(무게 대비 강성과 강도)은 3배나 향상되었습니다. 한 번에 하나씩 시도했다면 절대 찾아내지 못했을 최적의 설계를 찾아낸 것입니다.
병렬 혁명의 시작
GM, Siemens, NASA의 사례는 '직렬에서 병렬로'의 전환이 제조업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리적 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이라도, AI를 활용하면 수천 개의 가능성을 동시에 탐색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검증하던 시대를 넘어, 병렬적으로 최적의 답을 찾아내는 방식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설계 도구가 하나 더 생긴 이야기가 아닙니다. 테일러리즘과 포드 시스템이 생산 방식을 바꿨고, 린 스타트업이 제품 개발 방식을 바꿨듯이, AI는 혁신 방법론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모든 조직이 Generative Design을 도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계 방식, 도구, 기술을 바꾸고, 새로운 스킬을 학습하며, 때로는 생산 설비까지 변화시켜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분명 존재합니다. 당장 내일부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이 아닙니다. AI가 기존의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조직 특히 리더들이 인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작고 쉬운 실험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실무자가 매일 만들어내는 업무 결과물 중, 가장 변화 시키기 쉬운 영역부터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조직의 특정 직군이나 팀이 기존 직렬 방식으로 만들던 결과물을, 생성형 AI로 병렬 방식으로 바꿔보는 것입니다. 그 효용을 평가하고, 그 경험을 조직 내에 공유하는 것입니다.
AI가 가능하게 하는 '병렬적 사고'는 제조업의 설계실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직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적용 가능한 변화의 씨앗일 수 있습니다.